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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새집을 짓는 다는 것은 배가 드디어 닻을 내리고 육지에 닿아 떠나지 않고 사는 삶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서울생활 41년을 접고 강원도 생활 7년 째, 돈이 있든 없든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어디에나 있고 또 이왕이면 "시골살이"자체가 자신의 as 라고 생각한다면 제대로 사는가에 대한점검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골살이에서 복많은 젊은 스님처럼 좋은 얼굴과 눈동자를다 가지라는 법은 없지만, 아쉬움은 피로가 누적된 회원분들의 모습이 태반이었습니다.
건강한 삶이라는 게 이웃과 조화를 이루고 궂은 일 품앗이 하는 관대함 또는 배려, 그리고 고생한 세월을 되돌아 이제는 흙과 더불어 자연 속에 농사꾼으로서의 삶을 시도하거나 그 실천을 하는 회원 분들로서는 실로 우리의 생활이 도시적
인 습관의 연장으로서는 시골살이의 잇점을 잃고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소식과 올바른 먹거리를 할 수 있는 시골의 잇점을 잘 활용하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흙과 또는 나무와 더불어 노동을 하고 밭을 일구어 밭작물, 채소를 자급하며 사는 것이 "올바른 먹거리의 삶"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도회지적 삶의 연장은 시골살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능하시면 좀 느리게 사시는 삶, 흙을 배우는 삶이 있어야 한다고 저 자신은 생각합니다.
신선한 자연수를 마음대로 마시며 몸을 자갈논에 물대기 식으로 화학비료(사람에게는 불필요한 약물에 해당)로 농사를 하는 것은 한계가 있듯이 우리 몸도 유기농식으로관리해야 된다고 믿는 사람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집짓기에 대한 시작은 내 몸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많은 것을 포기하기도 싫어하기도,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하는 도회지의 삶을 뒤로 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0여년 전 부터 계획을 실천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한옥문화원 회원이 되면서 한옥에 대한 1차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자라날 때 경복궁이 제 마당이나 마찬가지인 소격동에서 자라났으며 인사동의 여러가게를 통하여 많은 전통소품을 보며 자랐습니다.
유명한 고택들의 공통점(살림집으로서의)은 그 집안의 사람됨됨이와 같이 합니다.
한 예로서 정여창고택의 경우는 인민군 장교가 그집의 장손에게 잘 보존하라하고 당부까지한 그마을에 5대이상 덕을 베푼 내력과 더불어 집이 소실되지않고 남은 예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집은 우리의 품에 맞다면 더할 나위 없을 듯 합니다.
우리 몸과 우리를 돌아보며 우리가 사는 집에 내 품에 과연 맞는지 되돌아 보신적은 없으신지요.
저는 제 자신이 보잘것 없기에 그나마 1928년 토지조사사업 때 첫 등기된 낡은 초가집을 주소로 하며 살고 있으며 여전히 28년 당시 보다 더 공들여 보수한 내용은 별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낡은 집은 나를 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욕심을 줄이는 방법과 옛주인들의 화단과 나무가꾸기에 대한 마음들을 읽고 살수 있었고 글재주 없는 내게 책을 쓸 수 있게한 고마운 공간이 되었습니다(네이버 검색"평창이야기" 참조)
그런 중에 용평면의 지인으로 부터 터를 제공 받아 집옮기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이웃들의 중요함 그리고 이웃들의 이름으로 도회지적 삶에 익숙한 성쌓기에 익숙한 사람들, 그렇다고 원주민 이웃들 과의 진정한 교류도 힘들었습니다
종국에는 땅딱기와 돌쌓기 집터만들기만 실컷 한채 다시 옮기기를 결정했습니다.
기실, 처음에는 스키장과 가까워서, 고속도로 가까워서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제 자신이 여행하러 온 삶이 아니라 살며 죽으러 온 땅을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니까요)
가족의 동의하에 새로운 계획은 실천되었고 더 큰 고마움은 평생동지 이웃을 만나 나누는 삶에 대한 "공동체"의 시작이라는 공간이 선택된 것입니다.
물론 3년여의 교류는 있었지만 이리 빨리 뜻을 맞추는 과정은 서로에게 간단치 않은 과정이었지만 솔직함을 통해 합의하고 약정을 맺고 집옮기기에 적극 도움을 받는 과정 하나하나가 큰 이웃보다 편안한 이웃으로서의 삶의 가능성을 확신하는 즐거움이 더욱 컷기 때문입니다.
물론, 평창이외에도 집을 만드는 과정도 있었습니다.
치악산 자락의 신림이 아무리 좋았어도 제 공간은 되질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환이 드신 장모님이 계시는 곳이라 외면할 수 없는 곳입니다만, 주살림집으로서의 신림은 포기했습니다.
다만 문안인사드리며 집관리 하는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특히 지인들의 섭함을 돌리지는 못하더라도 혈연보다도 좋은 이웃 그리고 "가족의 공동선" 또는 "공동 가치" 의 중요성을 더욱 크게 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아파트값 난리법석은 욕심의 아우성입니다.
돈 때문에 애들 집안환경, 사업자의 집주소 등의 허울 속에 "타워 펠리스" 환상에 빠집니다. 집단 투기가치에 가슴칠 일만 생기고 있습니다.
이제는 옛집을 고칠일만 남았으며 오늘부터 시작입니다.
하순 장마 시작전에 일단락 지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이 곳에서 죽을 요량입니다 이제 다시 갈 곳은 없다는 생각으로 마당을 관리하고 지붕을 관리해 나가고 가족을 꾸려 갈 것입니다
